2025년 9월 27일 토요일

황남동에서 황오동으로, 이름을 옮겨가야 했던 축제의 사정


 

경주시 ‘황금카니발’ 논란은 단순히 이름을 두고 벌어진 저작권 분쟁이 아니다. 행정이 민간의 창작을 어떻게 다루고, 그 결과 어떤 감정이 남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커먼’이라는 기획사는 2022년부터 ‘황남동 카니발’을 운영해왔다. 지역 상권과 음악을 엮으며, 로컬의 호흡을 담아낸 축제였다. 그들이 제안한 ‘황금카니발’은 경주시와 함께 진행된 공모 사업이었지만, 행정은 이후 이 이름을 그대로 가져가 독자적으로 축제를 열겠다고 했다. 창작자는 자신이 만든 이름을 잃었고, 결국 축제를 떠나야 했다.



커먼은 황남동을 떠나 황오동으로 옮겨 ‘황오동카니발’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축제를 준비했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들은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지역과 사람을 연결하려 했다. 그러나 황오동카니발의 최종 라인업이 공개된 바로 다음날, 경주시의 ‘골든카니발’ 포스터가 등장했다. 놀랍게도 그 디자인과 콘셉트가 ‘황남동카니발’ 때와 너무도 비슷했다. 이 내막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 장면은 웃음보다 허탈함을 불러일으켰다.

행정은 흔히 예산을 이유로 행사의 주체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축제는 돈이 아니라 기억과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그 기억을 함께 쌓은 기획자와 관객을 배제한 채, 같은 이름과 비슷한 시각적 언어로 행사를 반복한다는 건 참여자를 단순한 소비자로 보는 태도다. 그들은 함께 축제를 만들어간 이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예산 집행의 근거와 실적을 남긴다.

문제는 행정이 창작을 다루는 방식이다. 행정은 창작을 ‘함께 만드는 일’이 아니라 ‘조달하는 일’로 본다. 입찰, 계약, 납품이라는 행정의 언어 속에서 창작은 하나의 결과물로 축소되고, 기획자는 공급자로 전락한다. 행정의 세계에서 창작은 감각이 아니라 성과로 평가된다. 새로운 시도는 리스크로 간주되고, 관행을 벗어난 아이디어는 관리 불가능한 변수로 취급된다. 그래서 행정은 늘 익숙한 것, 이미 입증된 것을 반복하려 한다. 그 결과는 늘 같다 — 복제된 축제, 비슷한 포스터, 잃어버린 맥락.

경주시의 과업지시서에 적힌 “결과물의 저작권은 발주처에 귀속된다”는 문장은 이 사고방식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한 줄 안에는 “창작은 계약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숨어 있다. 하지만 축제의 본질은 문장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기획자의 고민, 참여자의 경험, 지역의 공기가 엮여야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행정이 그것을 단가와 권리 조항으로 나눠 관리하려는 순간, 창작은 생명력을 잃는다.

커먼은 결국 황오동으로 옮겨 스스로의 축제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는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창작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퇴각이었다. 반면 경주시는 비슷한 이름과 콘셉트를 유지하며 ‘골든카니발’을 밀어붙였다. 이건 창작을 존중하지 않는 행정의 단면이자, 공공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복제의 제도화다.



행정이 진정으로 ‘지원’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스스로를 조달자에서 협력자로 바꿔야 한다. 지원은 단순히 예산을 집행하는 행위가 아니라, 창작이 싹트는 공간을 함께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행정은 여전히 창작을 효율과 관리의 언어로 다룬다. 그 결과, 도시의 문화는 서류상 존재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점점 사라진다.

축제는 복사할 수 없다. 공공이 민간의 창작을 관리 가능한 자산으로 여기는 순간, 그 도시는 창작자의 감각을 잃는다. 남는 것은 보고서와 포스터, 그리고 비슷비슷한 문장뿐이다. 행정이 만들어내는 것은 축제가 아니라 절차이고, 그 속에서 예술은 통제 가능한 숫자로만 남는다.

결국 이 사건은 묻는다. 행정이 말하는 ‘지원’은 진짜 도움인가, 아니면 점유인가. 창작자는 도시를 함께 만드는 동료이지, 한시적 프로젝트의 하청이 아니다. 지원은 소유가 아니며, 기억을 복사한다고 해서 그 축제의 마음까지 따라오지는 않는다. 행정이 창작을 존중하는 방법은 새로운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창작자의 이름을 지우지 않고 치켜세우는 일이다.



한국 남성이 일본 여성에게 끌리는 이유 — 욕망이 만든 문화적 착시

 


요즘 한국 사회에서 ‘한일 커플’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유튜브에는 한국 남자와 일본 여자의 연애 브이로그가 넘쳐나고, 언론은 ‘일본 여성의 한국 남성 선호’를 흥미로운 문화 현상처럼 다룬다. 표면적으로는 국경을 넘는 사랑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남성들이 느끼는 피로감과 불안, 그리고 회귀의 욕망이 얽혀 있다. 한국 남성이 일본 여성에게 끌리는 이유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미디어가 만든 환상과 사회적 긴장의 반작용, 그리고 문화적 회귀의 감정이 교차하는 복합적 현상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본 여성은 오랫동안 ‘온화하고 다정하며 남성을 이해해주는 존재’로 그려져 왔다. 1970~1990년대 일본 드라마와 만화, 잡지 속 여성상은 항상 조용하고 배려 깊으며, 감정을 절제한 인물이었다. 이 이미지는 일본 여성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바란 이상적인 여성상이 투사된 결과였다. 당시 한국의 현실에서 여성들은 점점 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일본 문화 속 여성상은 여전히 조용하고 순응적인 인물이었다. 이 대비는 한국 남성들에게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한국 여성보다 일본 여성이 더 부드럽고 이해심이 많다’는 믿음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도피적 욕망이 만들어낸 상상이었다. 즉, 일본 여성상은 타자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현실로부터의 피난처였다.

이 신화를 더욱 공고히 한 것은 뜬금없게도 바로 일본의 성인 영상물, AV였다. 인터넷이 대중화 된 1990년대 이후 많은 한국 남성들이 일본 여성의 첫 이미지를 AV를 통해 접했다. 그 화면 속 여성은 늘 친절했고, 남성의 비틀린 성적 욕망조차도 온전히 받아주는 성모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연출된 허구다. AV는 현실의 여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설계한 순종과 부드러움을 강조한 각본인 것이다. 시각적 경험은 매우 강력하다. 이는 왜곡된 성의식을 심어준다. 언어보다 깊이 각인된 이미지는 세대 전체를 통과하며 ‘일본 여성은 남성을 기쁘게 할 줄 안다’는 허구의 신화를 남겼다. 그렇게 일본 여성은 현실의 인물이 아니라, 남성 욕망의 시각적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한국의 남녀 관계는 피로하다. 경제적 부담, 연애 시장의 경쟁, 젠더 이슈를 둘러싼 갈등이 일상화되었다. 대화는 종종 논쟁이 되고, 연애는 이해보다는 검증의 과정처럼 느껴진다. 그 속에서 일부 남성들은 “일본 여성은 나를 비난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줄 것 같다”는 감정을 품는다. 이건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진득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회피하고 싶은 욕망이 된다. 즉, 일본 여성에 대한 호감은 타자를 향한 호기심이 아니라, 비판받지 않고 이해받고 싶은 피로한 심리의 반사다.

이 세대의 남성들이 겪는 피로와 혼란은 단지 젠더 이슈 때문만은 아니다. 그 뿌리를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국의 교육·가정문화가 만들어낸 성장의 결핍이 자리하고 있다. 입시 경쟁과 사교육 중심의 환경 속에서 청소년기는 ‘사람과 부딪히며 배우는 시기’가 아니라, ‘문제를 맞추고 순응해야 하는 시기’로 대체됐다. 학교와 학원은 아이들에게 정답을 요구했지만, 실제 사회는 정답이 없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많은 남성들이 타인과의 갈등을 감정적으로 조율하거나, 관계 속에서 자기 욕망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잃었다는 점이다.

문제에 부딪히면 부모가 대신 나서서 해결해주던 경험, 성적과 스펙으로만 평가받는 성장 구조는 인성이 성숙하는 경험을 빼앗았다. 이론과 유튜브 영상으로 모든 걸 ‘머리로만’ 배우는 세대는 실제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마찰,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는 연습을 하지 못했다. 결국 현실의 문제를 직접 겪고 견디는 대신, 불편한 감정을 피하거나 외부에 전가하는 방식이 익숙해진다. 여기에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부모세대의 기대가 더해지면서, 세대 간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난다. 부모는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낡은 기준을 요구하고, 자식 세대는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채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 감정을 소화하거나 관계를 조율하는 기술은 익히지 못했다. 이 복합적인 모순이 결국 오늘날 한국 사회의 남녀 갈등과 젠더 피로로 이어지고 있다.

이 감정의 바탕에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 사회가 겪은 젠더 권력의 전환이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 혐오’라는 단어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고, 《82년생 김지영》은 평범한 여성의 삶이 어떻게 구조적 차별에 얽혀 있는지를 드러냈다. 최근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시위에서도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서 행동했다. 이 변화는 사회적으로는 진보지만, 일부 남성들에게는 익숙한 질서의 붕괴로 체감된다. “예전엔 남자가 리드했는데, 이젠 말 한마디도 조심스러워졌다.” 이건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남성 주도 관계가 무너질 때 생기는 정체성의 피로감이다.

그 피로가 쌓일수록, 남성들은 자신을 이해해줄 타자에 대한 환상에 빠져든다. 하지만 이 피로가 항상 부드럽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 남성들은 감정의 방향을 잘못 돌려, 좌절과 열등감을 폭력으로 배출하기도 한다. 최근 사회면을 장식하는 수많은 데이트 폭력 뉴스는 단순한 개인 일탈로 보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남성들은 연애 관계에서 통제력을 잃는 순간, 자신의 무력함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회복하려 한다.

예전에도 이런 범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최근에는 그 공격성의 밀도와 빈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특히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약한 여성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잦아졌다는 점은 뚜렷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자신보다 강해 보이거나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는 남성을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폭력은 권력의 방향을 따라 흘러가며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고 여기는 존재를 향한다. 이건 분노가 아니라 왜곡된 위계의 복원 시도다.

더 문제적인 건, 이런 뉴스를 소비하는 일부 시선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여자를 때렸겠냐”는 식으로 가해자를 동정하거나, 피해자를 탓하는 댓글이 달린다. 이는 남성의 폭력을 개인의 감정 문제로 환원시키며 구조적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면죄하는 시선이다. 결국 폭력과 환상은 같은 뿌리를 가진다. 한쪽은 현실의 피로를 ‘이해해주는 타자’로 미화하고, 다른 한쪽은 그 피로를 ‘통제 가능한 타자’에게 투사한다. 방향만 다를 뿐, 둘 다 현실과 마주하기 두려운 피로한 주체의 반응이다.

이 감정은 이제 개인을 넘어 집단의 정서로 확산된다. 디시인사이드, 에펨코리아 같은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요즘 여자들은 너무 까다롭다’는 말이 밈처럼 떠돌고, ‘일본 여성은 남자를 세워준다’는 서사가 반복된다. 이런 문장들은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공동체적 위안의 언어가 된다. 그 안에서 남성들은 “세상이 변한 게 문제지, 우리가 틀린 게 아니다.”라는 확신을 공유한다.

이 집단적 감정은 점차 사회적 보수화와 결합하며 기존 체제를 방어하는 태도로 굳어진다. 진보를 요구하는 여성의 목소리와 그 피로감에 빠진 남성의 정체성은 서로를 향해 대립하며 팽팽히 맞선다. 문화적으로도 이러한 흐름은 90년대 애니메이션, 영화, 음악의 복고 열풍과 맞물린다. 그 시절은 남성 서사가 중심이던 시대였다. “그땐 세상이 단순했고, 남자가 중심이었다.” 이 복고는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현실의 피로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회귀의 욕망이다.

사실 외국인 여자친구 콘텐츠는 이전에도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유독 ‘일본 여친’ 콘텐츠가 넘쳐나는 건 이례적이다. “일본 여친은 도시락을 싸온다.” “일본 여친은 다정하다.” 이런 콘텐츠들은 단순한 문화 차이 소개가 아니라, ‘일본 여성 = 배려 깊은 존재’라는 오래된 신화를 시각적으로 강화한다. 과거 일본 문화가 한국보다 앞서 있던 시절, 한국 남성들은 일본을 세련되고 부드러운 나라로 인식했다. 그 동경이 지금은 여성 이미지로 전이되어 ‘일본 여친’이라는 콘텐츠로 소비되고, “한때 자신보다 우위에 있던 문화에 대한 향수”와 “지금보다 단순했던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겹친 결과로 나타났다. 즉, 일본 여친 콘텐츠의 과잉은 사랑 이야기의 포장지를 두른 문화적 집착의 표출이다.

결국 한국 남성이 일본 여성에게 끌리는 이유는 일본 여성에 대한 현실적 이해보다, 그들을 통해 투사되는 남성의 내면 욕망 때문이다. 이해받고 싶은 욕망, 비판받지 않고 사랑받고 싶은 욕망, 잃어버린 주도권을 되찾고 싶은 욕망. 하지만 판타지는 언제나 현실보다 달콤하다. 실제 일본 여성들도 한국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기 세계를 지키기 위해 독립적이고 싸우는 존재들이다. 그들을 온화한 타자로 소비하는 순간, 관계는 현실이 아닌 허상 위에 세워진다.

한일 커플의 증가는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을 나누는 일은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일본 여성’이라는 기호인지, ‘한 사람의 현실’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건 결국 판타지일 뿐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의 언어와 현실까지 함께 이해하는 일이다. 일본 여성은 ‘부드러운 타자’가 아니라, 자신의 언어와 세계를 지닌 주체적인 인간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진짜 관계가 시작된다.

문화는 사람을 잇기도 하지만, 때로는 환상이 사람을 가리기도 한다.

황남동에서 황오동으로, 이름을 옮겨가야 했던 축제의 사정

  경주시 ‘황금카니발’ 논란은 단순히 이름을 두고 벌어진 저작권 분쟁이 아니다. 행정이 민간의 창작을 어떻게 다루고, 그 결과 어떤 감정이 남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커먼’이라는 기획사는 2022년부터 ‘황남동 카니발’을 운영해왔다. 지역 상권과...